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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헌 목록 〉11. 11世 〉2. <요재공>절사모충재공휘여관행상(節士慕忠齋公諱汝寬行狀)
1. 문헌 목록 〉11. 11世 〉4. <요재공>추모재기(追慕齋記)휘여후(諱汝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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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요재공>증조봉대부사헌부지평모충재공휘여관묘갈명(贈朝奉大夫司憲府持平慕忠齋公諱汝寬墓碣銘)
贈朝奉大夫司憲府持平慕忠齋公諱汝寬墓碣銘 粤在穆陵之際能兼道學節義文章者惟重峯先生爲然同殉於錦山之役者殆七百人生焉而學其學死焉而義其義者慕忠齋趙公亦其一也後孫壽民抱公從曾孫克謙狀德之文赴四百里謁墓銘於不佞不佞禮辭不獲命謹按公諱汝寬字士弘慕忠其號也趙氏系出玉川以高麗門下侍中璋爲上祖侍中生洪珪官版圖判書判書之子佺孫元吉皆封玉川府院君元吉五子瑛居長麗朝判書入我朝太宗以吏判師傅屢徵不起文郡守士淳縣監淵敎授彭齡參奉應堅高曾祖考四世也公生而氣像嚴整志節慷慨清謹忠孝根於天性受學於家庭七歲能通孝經署朱先生八字符於其上十五志于學以敬律身二十來歲就正於重峯之門先生知其有大節嘗語人曰國將有難能死於節者必此人也一日侍坐會有天變公乃太息曰此兵象也應在後十年先生奇之自是厥後餘力讀兵書且習弓馬朝吟而暮誦者烈士殉義之傳及至壬辰之燹三京連陷大駕播越公作赴敵歌以見志有爲君死節戰場白骨斬敵懸樹歸事聖主等語義檄文又有大義與春秋同行壯節與日月爭光之句今讀其篇令人氣涌如山當日之皷動士氣得人之死力可知矣不幸後重峯二十日而殉義以有止公勿赴敵以圖後功之意也前後斬馘爲五百餘級公盖義士中傑然者也萬曆乙巳特遣御史按問蠲徭給復純祖己卯以儒生上言贈司憲府持平衣履爲阡禮不經見然其弟汝誠收歛公齒髮葬于淳昌赤城面東亭後考墓右負子原配贈令人南原尹氏舜成女墓合封子義孝亦以追喪旌閭以伯父無后折小宗入後盖據石渠議也汝誠同在錦城亦有日記一通載在兩世忠孝錄當公之赴義也顧謂其妻曰婦方有身而兄己無嗣幸而生男遂續兄後以奉先祀爲也婦曰妾亦知宗祀之重謹當無違妾之所望臣爲其君惟忠而己公果不返而其追喪盖以是也嗚呼穆陵所以爲中興之主而恢復我彊士者實賴義兵爲之倡天將爲之仗也目今箕封之域變夏胥夷之不暇安得如公者十數人置之方面則國我國而人我人庶不至夷狄禽獸之歸矣遂嘆息而爲之銘銘曰節義藩籬自道學來惟此活孝靈籙再縞開素討敵敵亦知畏天何不助火發風外馘至五百何功之有中興基本盖亦有自所在致死於師於君戴記一言於公可云百世風聲頑廉懦立凡君子視此刻石 月城 崔益鉉 撰 증조봉대부사헌부지평모충재공휘여관묘갈명(贈朝奉大夫司憲府持平慕忠齋公諱汝寬墓碣銘) 생각하건대 선조(宣祖)대왕 때에 능히 도학절의 문장을 겸한 자는 오직 중봉(重峯)선생인데 함께 금산(錦山)의 싸움에 순국한 자 자못 七百인으로 살아서는 그 학문을 배우고 죽음에는 그 의리를 옳게 한 자 모충재 조공이 또 그 한 사람이었다. 후손 수민(壽民)이 공의 종증손 극겸(克謙)이 쓴 행장을 가지고 四百리를 다다라 나에게 묘갈을 청하므로 예로써 사양하다가 할 수 없어 삼가 안찰하니 공의 휘는 여관(汝寬)이요 자는 사홍(士弘)이며 모충은 그 호였다. 옥천조씨인데 고려문하시중 장(璋)을 상조로 생 판도판서 홍규(洪珪) 판서의 아들 전(佺) 손자 원길(元吉)이다. 옥천부원군에 봉하였다. 생휘 영(瑛) 고려판서로 아조 태종(太宗)이 이조판서 세자사부로 자주 불러도 나아가지 아니하였다. 문과군수 사순(士淳) 현감 연(淵) 교수 팽령(彭齡) 참봉 응견(應堅)은 고증조고 四세이다. 공이 나면서 기상이 엄정하고 지절이 강개하며 맑고 삼가 안 충성과 효도는 천성에 뿌리한 것이요 가정에서 학문을 배워 七세에 능히 효경(孝經)을 통달하고 주선생(朱子) 八자 부서를 벽상에 써 걸었다. 十五세에 학문을 뜻을 두고 공경경사로써 몸을 다스리며 二十세에 중봉(重峯)의 문하에 나아가 바로 잡으니 선생이 큰 절의가 있음을 알고 일찍 사람에게 말하되 나라에 장차 변란이 있으면 능히 절의에 죽을 자는 반드시 이 사람이라 하였다. 하루 모시고 만졌는데 때에 천변이 있으니 공이 이에 크게 탄식하고 이는 난리 날 증조라 하더니 十년뒤에 과연 응하니 선생이 기특히 여기었다. 이로부터 여가로 병서를 읽고 또 활쏘기와 말달리기를 연습하여 아침에 읊고 저녁에 외운 것은 열사 순국한 전기였다. 임진(壬辰)왜란을 당하여 三경(三京)이 연해서 함락되고 인군의 수레가 파천하니 공이 전진에 다다를 노래를 지어 써 뜻을 보이고 인군을 위하여 절의에 죽어 전장백골이 되고 적을 베어 나무에 달고 돌아가 성주를 섬긴 다는 등 절의에 찬 력문이 있고 또 대의는 춘추로 더불어 동행하고 장절은 일월로 더불어 빛을 다툰다는 글귀가 있어 이제 그 책을 읽으매 사람으로 하여금 기운이 산같이 솟게 하니 당일에 사기를 두들겨 움직여 사람의 죽음 힘을 얻은 것을 가히 알겠도다. 불행히 중봉이 二十일뒤에 순절하면서 공더러 적진에 다다르지 말라 만류한 것은 써 뒤에 도모하라는 뜻이로다. 전후 베인 귀에 五百여 두룸이니 공은 의사중에 빼어난 자이다. 만력을사(萬曆乙巳)년에 특별히 어사를 보내 안문하여 부역을 감제하고 전토를 하사하며 복호하고 순조기묘(純祖己卯)년에 유생의 상주로 사헌부지평의 증직을 받고 옷과 신발로 묘도를 하였더니 예법에는 일찍 보지 못했으나 그 아우 여성(汝誠)이 공의 이빨과 머리털을 거둬 모아 순창 적성면 동정뒤 고묘우자좌에 장사하였다. 배는 영인 남원윤씨 순성녀로 묘소는 합봉이고 아들 의효(義孝)가 또 다라서 복상함으로써 정려하였으며 백부가 무후하므로써 작은 집 뒤를 끊고 입후한 것은 대개 석거(石渠) 의론을 따름이었다. 여성(汝誠)이 함께 금성(錦城)에 있으면서 또 일기 한통이 있어 양세충효록에 실려 있다. 공이 의거에 다다를 때에 그 부인을 돌아보고 일러 가로되 자기가 지금 포태를 하였는데 형이 이미 후사가 없으니 다행히 아들을 나면 형의 뒤를 이어 선영의 제사를 받들게 하라 하니 그 부인이 말하되 첩도 또한 종사의 중한 줄을 아니 삼가 마땅히 어김이 없을 것이요 첩의 바라는 바는 신하는 그 인군을 위하여 오직 충성할 따름이라 하였다. 공이 과연 돌아오지 아니하고 그 따라 죽은 것은 대개 이로써 함이었다. 오홉다. 선조(宣祖)는 중흠한 인군으로 우리 강토를 회복한 것은 실로 의병의 창의에 힘입고 하늘이 장차 보우한 때문이다. 현재 우리 동방이 중화문물이 변하여 이적이 될 겨를이 없는데 어찌 공과 같은 자十수인을 얻어 각 방면에 배치한즉 우리나라를 나라로 우리 사람을 사람으로 하야 거의 이적(夷狄) 금수의 지경에 이르지 아니할 것이다. 마침내 탄식하고 새겨 가로되 동방절의는 도학으로부터 왔는데(節義藩籬白道學來) 오직이 산효도는 신령한 비기가 두 번 열렸다(惟此活孝靈籙再開) 백의로 적을 치니 적이 또한 두려워하네(縞素討敵敵亦知畏) 하늘이 어찌 돕지 아니하였는가. 불이 바람 밖에 일어났도다(天何不助火發風外) 五百적군의 귀를 베었으니 무슨 공을 얻었는가(馘至五百何功之有) 중흥기본이 대개 또 이에 있었다(中興基本盖亦有自) 있는 곳에서 죽은 것은 스승과 인군을 위해서였다(所在致死於師於君) 이 한 말을 실은 것이 공에게 가할 것인가(戴記一言於公可云) 백대성교에 완악한 자가 청렴하고 게으른 자가 부지런하니(百世風聲頑廉懦立) 무릇 우리 군자는 이 새긴 돌을 볼지어다(凡君子視此刻石) 월성(月城) 최익현(崔益鉉) 찬(撰) 註:※三京:한양, 개성, 평양 ※석거(石渠):한나라 황실의 도서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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